실버스톤...
예전(1999년)에...
개인 홈페이지를 운영했었습니다.
Moontour.com이란 도메인을 등록하고...
오디오관련 홈페이지를 운영했었는데...
그 당시엔 개인이 홈페이지를 운영한다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고...
인터넷이 지금처럼 널리 보급되지도 않았을 때였지만...
나름 방문자가 많았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로 홈페이지를 폐쇄했지만...
그 때의 자료들이 좀 남아있어...
블로깅 초기에 좀 올렸는데...
아쉽게도 묻혀버려...
틈나는대로 다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예전에 운영했던 홈페이지의 대문입니다.
지금에 비하면...
많~이 허접하죠.
^^;;;
사실...
좀 더 세련된 홈페이지를 재오픈하려고...
준비까지도 했었는데...
결국 못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홈페이지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또 많~은 일들을 했었죠.
아직까지 인연을 맺고 있는 분들도 계시고...
오늘은...
방문자를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었던...
지난 해 블로깅 초기때 올렸던...
포스팅을 퍼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길!!!
***
JBL
분위기 있는 카페나 음식점 등에서 자주 접하는 스피커중 하나가...
JBL과 BOSE스피커입니다.
그 중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스피커가 아래 Control 1이죠.
저렴하기도 하거니와...
설치도 쉽고...
소리도 좋고...
내구성도 좋아...
많~은 업소에서 선택하는 스피커입니다.
그런데...
JBL...
단지 상표로만 알고 있는 분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의류메이커 "타미힐피거"처럼 사람이름입니다.
JBL
James Bullough Lansing...
오늘은 그의 영화같은 삶을 간단히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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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Bullough Lansing
(1902 ~ 1949)
1902년 미국의 일리노이주에 있는 작은 마을 "고핀"에서 탄광기사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14명의 형제중 아홉번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기나 기계에 대하여 많은 호기심과 흥미를 가졌으며 자라면서 축음기에 대한 호기심은 대단하였다. 뿐만아니라 손재주도 특히 뛰어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소형 무선송신기를 직접 조립하여 모로스부호를 이용해 그 당시는 일반인이 하기 힘든 아마츄어 무선사 노릇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처음 갖게 된 직업은 자동차 수리공이였다. 기계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항상 주인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그 후, 22세의 랜싱은 아마츄어 무선사노릇을 했던 경험을 살려 "솔트레이크"시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 취직이 하여 송신기사로 약 3년간 근무하게 된다. 그가 라디오 방송국에서 근무할 당시만해도 미국의 라디오 방송기술은 초기단계에 있었으며 당시 라디오 방송을 청취하는데 사용된 스피커는 너무 형편없었다.
필요가 발명을 낳는다고 이 때부터 그는 이러한 형편없는 스피커를 개조할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그러던중 동료인 "켄 데커(Ken Decker)"와 라디오나 레코드 산업에 없어서는 안될 음질이 뛰어난 새로운 스피커의 개발에 뜻을 같이 하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사업 계획을 구상하게 된다. 그 결과 1929년 그들은 "렌싱 - 메뉴펙쳐링"이란 간판을 걸고 L.A.에 자그마한 회사를 꾸미게 되었다. 다행히 그 이듬해인 1930년부터 미국내에 유성영화가 번창하게 되었고 그 당시 영화관에 음향설비를 독점 공급하고 있던 "웨스턴 일렉트릭(Westem Electric)"사와 손을 잡게 된다.
당시 유성영화시대가 막 시작되는 단계였으므로 스피커의 음질수준은 엉망이었 으며 랜싱은 재생주파수 대역이 넓고 다이나믹 레인지(Dynamic Range)또한 커 관객에게 실감을 줄 수 있는 스피커를 설계하게 된다. 그 결과 보이스 코일을 원형에서 리본형으로 바꾸어 능률이 뛰어난 스피커를 개발하게 되었으며 이전에 극장용 스피커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스피커들을 완전히 대체시킬 정도로 대단한 성공을 거두게 된다. 또한 스피커뿐만 아니라 파워앰프와 디바이딩 네트워크, DC전원시스템등에 대한 연구 및 개발에도 참여해 공장은 눈코뜰사이없이 바빠졌고 직원도 40여명정도로 불어 났으며 그의 두 동생 "빌 마틴"과 "죠오지 마틴"도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
사업을 시작한 후 5년 뒤인 1934년, 랜싱은 15인치 우퍼를 커다란 베이스 리플렉스 (Bass-Reflex) 통에 넣고 혼트위터를 사용한 2웨이 프로용 스피커 시스템을 세상에 처음 내놓는다. 그 당시 이러한 2웨이 구성의 스피커는 이 분야에서는 처음이었으며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원전으로 남아있다. 이때부터 그의 스피커시스템은 성능을 인정받아 MGM사를 위시한 영화 상영관의 표준 시스템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회사는 날로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운이 없게도 영업과 관리부분을 맡아 오던 동업자 "켄 데커"가 1938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회사의 경영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끝내 재정난을 이기지 못해 1940년 "웨스턴 일렉트릭"사의 퇴직기술자들이 세운 "알텍(Altec Theater Service Corporation)" 사에 회사를 넘기게 된다. 알텍의 경우,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극장음향설비의 보수 및 관리가 주된 사업영역이었다. 그러나 회사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결국 1941년 회사이름을 "알텍-랜싱"으로 바꾸는 조건과 5년간의 근무를 조건으로 기술담당 부사장자리에 랜싱을 영입하게 된다. 이후 랜싱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두 개의 스피커 시스템을 세상에 내놓는다. 바로 1943년에 발매되기 시작한 동축형 스피커 시스템(No. 604)과 뒷면이 밀폐된 2웨이 스피커 시스템인 A-4형 시스템이다.
그후 2차대전이 발발 하였으나 전쟁의 와중에도 랜싱은 스피커의 개발에만 혼신을 다했으며 그 결과 적의 잠수함을 탐색하기 위한 자성탐사기에 사용되는 알니코V 영구자석을 스피커에 이용 하였으며 이렇게 영구자석을 스피커에 적용하기는 랜싱이 세상에서 처음이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알텍-랜싱"과의 계약기간도 종료되자 랜싱은 1946년 다시 "랜싱-사운드-인코퍼레이티드" 라는 회사명으로 자신의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그러나 이 회사명은 "알텍-랜싱"사의 항의로 인해 "제임스. B. 랜싱 사운드 인코퍼레이티드"로 변경되었다. 이후 랜싱은 지금까지도 오디오 매니아 들에게 사랑받고 있는 D-130 풀레인지 스피커와 175드라이버를 개발하게 된다. D-130의 경우, 직경이 4인치나 되는 보이스 코일과 알루미늄재질의 센터돔, 만곡형 콘지, 자속밀도가 12000 가우스나 되는 강력한 알니코V 자석을 채용하여 능률이 대단히 높아 그 당시에는 획기적인 스피커였다.
이러한 신제품개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경영수완은 없고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했던 그이기에 결국 1947년 회사주식 40%를 양도한다는 조건하에 "Marguardt"항공사로부터 경영자금을 빌려 쓰게 된다. 이때 "Marguardt"항공사의 경리부장인 토마스(William H. Thomas)가 JBL사의 중역으로 영입되며 이후 그는 랜싱이 사망한 뒤 JBL사를 이끌어 가게 된다.
1947년, JBL사는 캘리포니아주의 베니스에 위치한 "Marguardt"항공사의 공장내로 공장을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회사를 살리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도 불구하고 1948년, 경상이익은 또 다시 적자를 였으며 "Marguardt" 항공사에 진 부채도 그 당시로서는 대단히 큰 만오천달러에 이르러 결국 "Marguardt" 항공사에 합병될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불행중 다행으로 "Marguardt"항공사도 그 당시 미국의 유수기업이였던 "제너럴 타이어"사에 넘어가고 이 와중에 토마스는 "Marguardt"항공사에서 나와 JBL사의 재건을 위해 랜싱을 도와 경영에 직접 참여하게 된다.
이후, 1949년초 회사를 다시 LA에 있는 후렛쳐 드라이브로 옮기고 회사를 회생시키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한다. 이러한 터에 평소 랜싱의 가식없는 인간성과 기술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에 감복한 "로버트 아놀드(Robert Anold)" 라는 재력가의 지원을 받게 된다. 그는 미국의 스피커업계에서 상당히 영향력이 있는 인물로 랜싱의 영구자석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경영에 소질이 없어 시대에 맞는 기업변신에 실패한 랜싱을 늘 동정해 오던 터였다. "로버트 아놀드"의 도움으로 알니코V 영구자석을 2년간 무상으로 공급받게 된 랜싱은 계속해서 스피커개발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사는 경영부진이 계속되었고 부채는 2만달러까지 늘어났다.
이렇게 몇 년동안 계속되는 경영부진으로 인해 랜싱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심한 고통을 받게 된다. 결국 그는 1949년 9월 29일 목요일 마지막으로 자신의 일생을 바친 공장을 둘러 본 뒤 늘 아끼던 느티나무에 47세의 나이로 목메어 자살하였다. 그가 죽은 후, JBL사는 동업자이자 그를 숭배자로 여기던 "토마스"의 경영아래 그의 생명 보험금으로 지급된 1만불을 기반으로 회사를 다시 일으키는데 전종업원이 합심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그 결과 1955년 "핫츠필드(Hartfields)"가 "Life"지의 표지에까지 등장할만큼 격찬을 받았으며 계속해서 스테레오 시대가 열린 1957년 "파라곤 (Paragon)"을 발표하여 전세계 오디오 매니아들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그후, 60년대와 70년대에 등장했던 스튜디오 모니터 시리즈 스피커는 그 당시 녹음스튜디오의 표준기기로서 널리 애용 되었다.
이렇게 랜싱은 죽었지만 그의 혼과 스피커에 대한 열정은 아직 살아남아 1950, 60년대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스피커계에 JBL이 만들어 낸 수많은 신화와 업적은 해가 갈수록 그 진가를 더해가고 있다.
살아있는 동안, 랜싱은 스피커 연구외의 시간에는 대부분의 시간을 독서로 보냈으며 가끔 골프를 즐겼다. 음악은 클래식을 좋아했으며 댄스음악에 맞추어 댄스를 즐기는 것을 좋아했다. 스피커 연구에 몰두할 때에는 무서울 정도로 고집스럽고 성실하였으며 스피커를 설계할 때는 항상 순도가 높고 투명한 음질과 청취자의 마음을 사로 잡을 수 있는 박력있는 음을 목표로 삼았다. 이를 위해 그는 전기, 물리, 수학등 스피커 설계에 필요한 학문을 독학으로 마스터했으며 일단 스피커 설계에 한번 몰두하게 되면 휴일, 밤낮을 가리지않고 연구실에 틀어 박혀 연구에만 몰두하는 오로지 스피커만을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위대한 기술인, 아니 예술가의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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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JBL은
하만카든을 비롯하여 마크레빈슨, 렉시콘, 인피니티 등 유수의 오디오 메이커들과 함께
하만인터내셔널그룹(http://harman.com)에 속해있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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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하는 남푠 실버스톤(SilverStone)의 오디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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